[횡설수설/우경임]임신 중지약

1 week ago 28

서구 사회에서 ‘낙태권’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충돌하는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다. 우리 사회에선 그 논쟁의 결이 상당히 다르다.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낙태죄는 존재했다. 20년 뒤에는 산아 제한을 위해 모자보건법으로 낙태 허용 범위를 넓혔다. 사실상 낙태를 허용한 셈이 됐다. 산부인과가 인공임신중절로 건물을 올렸다던 시절이다. 2010년대 들어 저출생이 심화하자 정부는 다시 낙태를 단속하려고 움직였다. 이에 반발한 여성계가 낙태죄에 반대하는 검은 옷 시위를 벌였고 국가의 통제로부터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하자는 맥락에서 ‘낙태권’이 공론화됐다. 그 결과가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내린 형법상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결정이다. ▷헌재 결정에 따라 형법과 모자보건법은 낙태를 허용하는 임신 주수와 범위를 정의하고, 먹는 임신중지 약을 허용하도록 고쳤어야 했다. 하지만 7년이 지나도록 후속 입법이 되지 않았다. 종교계, 여성계와의 갈등이 껄끄러운 국회와 정부가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낙태가 더 이상 처벌 대상은 아니지만, 합법적 임신중절도 할 수 없는 ‘입법 공백’ 동안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2024년 임신 36주 차에 낙태 수술을 받고 그 과정을 낱낱이 공개한 브이로그 영상이 올라왔다. 조작 영상이거니 했는데 실제 태어난 아이를 해친 사건이었다. ▷7년간의 입법 공백은 국회, 정부가 얼마나 여성 건강과 태아 생명에 대해 무심한지를 방증한다. 해당 영상에 등장하는 병원은 2022년부터 2년간 브로커를 통해 낙태 환자 527명을 소개받아 14억6000만 원을 벌어들인 사실이 경찰 수사로 드러났다. 절박한 사정의 일부 여성들은 해외 직구로 정품 여부도 확실치 않은 임신중지약을 구해 복용하거나 아니면 브로커를 찾아 위험수당을 얹은 비용을 내고 수술대에 올랐다. ▷정부가 이르면 내년 1분기부터 임신 9주 이내 여성에게 임신중지약을 허용하기로 했다. ‘미프진’이라는 먹는 약으로 프랑스, 미국, 캐나다 등 101개국에서 허용되고 있다. 임신중지약 도입 초기 2년간은 의사가 직접 처방·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부작용 검토 등을 거쳐 점진적으로 확대한다. 음성적인 낙태를 방조할 수 없으니, 입법에 앞서 정부 지침으로 허용한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미국에서도 낙태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49년 만에 뒤집힌 것이 4년 전이다. 낙태권을 둘러싼 찬반 논쟁은 그만큼 치열하다. 입법으로 보호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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