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광주광역시 예술의전당 내 광주시립발레단 연습실에서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45주년을 기념한 공연 '디바인'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컨템퍼러리 발레 안무가로 미국 뉴욕을 근거로 활동하고 있는 안무가 주재만이 창작해 2023년 초연한 이 작품은 지난해에 이어 3번째 공연을 앞뒀다. 주재만은 지난 5일부터 광주에 상주하며 단원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주재만의 옆자리에는 박경숙 광주시립발레단장(67)이 자리를 지키며 개별 단원들의 디테일을 잡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10개의 씬이 이어진 85분간의 리허설이 끝난 뒤, 박경숙 단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광주시립발레단은 지역 발레단이라 서울에 있는 단체와 비교하면 운영상 한계가 참 많습니다. 예산도 국립발레단의 10분의 1도 안 돼요. 현실을 탓하기보단 우리만의 고유한 레퍼토리를 발굴하고 같은 클래식 발레라도 새롭게 해석된 버전을 올리면서 차별화된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광주시립발레단은 올해로 창단 49년을 맞는, 지역 발레단으로서는 유일하게 반백년을 이어왔다. 고전발레 대작을 레퍼토리로 보유한 데다 무용수들 실력이 뛰어나 서울에서 보기 힘든 작품들도 꾸준히 무대에 올렸다. 단장이 "본업을 잘해야 단체의 예산도 오르고, 무용수들의 처우도 좋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올해에도 대한민국 발레축제에 참여해 서울 예술의전당서 '코펠리아'(5월 31일)를 선보일 예정이다. 오는 9월에는 러시아의 프리무스키 발레단(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한 러시아 발레단)의 예술감독이자 안무가가 재해석한 '해적'을 무대에 올릴 예정. 현대와 괴리감이 있는 노예시장 장면을 대폭 축소하고, 발레리노들의 군무를 확대해 박진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수많은 레퍼토리 가운데 박 단장이 특히 애착을 갖는 건 본인이 주도해 창작한 '디바인'이다. 광주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까지 이곳에서 살다 이화여대 무용과에 진학하며 처음으로 광주를 떠났다. 졸업하자마자 국립발레단에서 13년간 무용수로 활동한 뒤, 광주로 돌아와 광주여대에서 교편을 잡았고 발레단의 2대 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22년부터는 7대 단장으로 돌아와 다시 발레단을 이끌고 있다. 그는 "고향이 자꾸 나를 부른다. 발레로 고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든다"고 고백했다.
박경숙 단장은 2022년 주재만 안무의 '비타'를 본 뒤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직접 의뢰했다. 주재만 역시 광주가 고향으로, 1980년 5월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광주의 예술인들에게는 5·18민주화운동이 숙제와도 같은 역사적 사건이에요. 저도 꼭 발레로 창작하고 싶었어요. 총과 칼이 나오고, 피를 흘리는 장면을 보여주기보다는 희생과 애도라는 걸 발레로서 숭고하게 표현하길 원했습니다. 안무가가 그 점에 착안해 세계에도 통용될 수 있는 대작을 만들어 주었지요." 오는 16일과 17일, 광주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되는 디바인은 고전 발레가 아닌 컨템퍼러리 작품인데도 유료 티켓 판매가 80%이상 이뤄졌다.
박 단장은 "디바인만큼은 각지에서 이 작품을 만나기 위해 와주시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디바인의 연출 또한 백미다. "까만 눈처럼 표현되는 '재'를 연출로 형상화하고, 권력과 강압을 표현하는 커다란 벽이 대극장 무대에 정말 잘 어울려요. 막바지로 갈수록 천국에서 춤추는 듯한 동작이 이어지는데, 군무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이날 역사에 휘말린 광주 시민들 한명, 한명을 연기한 무용수들의 표정에도 진지함이 가득했다.
박 단장은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는 비극이 펼쳐지고 있다"며 "이 작품이 언젠가 세계 무대에 소개돼 비극적 사건을 겪은 인간 누구에게라도 위로가 될 수 있는 작품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