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말하는 자비와 용서
‘눈에는 눈’ 보복정의, 형벌의 출발… 신체형에서 인권 고려 형벌로 변화
피해자 용서-가해자 화해 가능할까… 처벌하지 않음이 정의의 궁극 목표
용서와 화해는 법의 테두리 넘어서… 결국 피해자가 견뎌낼 역량에 달려
프랑스에는 고문 기구와 수사 기법 등 범죄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파리경찰청 박물관이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역시 신체형과 관련된 형벌의 변화를 다룬 책이다. 절대군주제 사회에서 군주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죄인의 신체에 잔혹한 고문을 가하고 고통을 극대화하는 ‘신체형’을 집행했다. 살인을 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고통의 정도와 방식을 계산해 형벌을 내렸으며, 배를 갈라 끓는 물을 붓는 잔인한 형벌도 있었다. 과거 우리에게도 목을 베거나 사지를 찢는 처형 방식이 있었다.
그렇다면 피해자의 용서를 바탕으로 한 가해자와의 화해는 어떻게 가능할까. 만약 둘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한다면 누가 이를 조정해 균형을 잡을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해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자비와 용서의 원칙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제시한다. 국가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정당한 권력을 행사하며, 엄격한 법의 원칙을 통해 균형과 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니체는 사형과 같은 잔인한 처벌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처벌하지 않음’을 정의의 궁극적인 목표로 제시한다. 가해자에게 보복하지 않고 죄를 용서하는 태도가 바로 자비다.
국가가 개인의 사적 보복이나 자력구제를 금지하는 이유는 모든 피해 보상이 객관적인 법의 원칙에 따라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 가치이며, 그 기준은 국가와 개인의 역량, 즉 힘의 크기에 달려 있다. 똑같은 범행이라도 국가 전체의 존립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처벌은 약해질 수 있다. 동일한 범죄에 대한 처벌도 공동체의 존재 방식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가령, 좀도둑과 같은 범죄는 공동체의 힘이 약할 때 엄격하게 처벌되지만 공동체가 안정되고 힘이 강해지면 더 이상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같은 도둑질이라도 전시 상황에서는 큰 처벌을 받지만, 복지국가에서는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다.
개인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빵을 훔쳐 감옥에 간 장 발장과 같은 좀도둑은 피해자의 상황에 따라 유죄가 될 수도 있고 무죄가 될 수도 있다. 편의점 사장이 사소한 도둑질을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처럼, 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권력에 큰 손상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군주가 범죄자를 사면하는 이유는 선한 의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에서 베푸는 가짜 자비인 셈이다. 여기서 용서를 베푸는 데 중요한 것은 선처를 호소하는 가해자의 태도가 아니라 피해자의 역량이다. 피해자의 분노를 조정하는 과정은 민법과 형법 등 법적 절차를 통해 이뤄지지만, 자비는 법적 차원의 문제와는 다르다. 범죄자에 대한 피해자나 대중의 분노는 그들의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처벌을 원하지만, 법의 체계가 발전할수록 사적 감정에 따른 보복보다는 당사자 간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니체에 따르면 용서와 관용, 자비는 강자가 약자에게 베풀 수 있는 축복이다. 따라서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그만큼 사회적 힘이 강하다는 뜻이다. 자비와 용서의 기준은 가해자에 대한 값싼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피해자가 피해를 견뎌낼 수 있는 역량의 크기다. 여기서 자비를 이끌어 내는 올바름이란 사적 보복이나 원한에 오염되지 않은 객관적인 태도인 공정함을 말한다. 편파적이지 않고 악의도 없어 훌륭한 양심에 따라 판단할 때 자비는 강한 자, 가진 자의 특권이 된다.
화해와 용서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통합을 위해 꼭 이뤄야 할 중요한 과제다. 자비는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것을 정의로 여기는 비례와 상호성이라는 법의 원칙을 넘어선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해충돌이 완전히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니체가 자비를 ‘정의의 자기지양(自己止揚)’이라고 강조한 것은 용서와 화해가 법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법의 통제가 무력화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복수의 감정을 넘어 타자를 품을 수 있는 자신의 그릇을 키울 필요가 있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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