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섭 칼럼]진영정치의 끝에서 만난 ‘교차투표’라는 시적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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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양극화 속 10년 만에 부활한 교차투표
정당 일괄투표 시대에 이례적인 민심 변화
정당보다 후보, 권력에 대한 견제심리 작동
정치권, 진영논리에 경고한 민심에 답할 때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6·3 지방선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교차투표(split-ticket voting)의 부활이었다. 교차투표는 한 유권자가 서로 다른 정당의 후보들에게 표를 나눠 주는 행동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서울, 부산, 울산 등 세 곳에서 교차투표가 나타났다. 즉, 두 거대 정당을 기준으로 보면 기초단체장 선거와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더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이 서로 달랐다.

교차투표는 정당보다 후보 개인의 능력 또는 정책을 보고 뽑거나, 한 정당의 권력 독점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할 때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1972년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가 49개 주에서 이겼지만 의회에서는 민주당이 다수당 지위를 지켰는데, 이를 권력 독점에 대한 견제 심리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1984년 대선에서도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가 역시 49개 주에서 승리했음에도 하원에서는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유지했다. 미 남부의 보수적 민주당 지지층, 이른바 ‘레이건 민주당원(Reagan Democrats)’의 교차투표가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교차투표가 의외인 것은 정치적 양극화가 극에 달한 정치 환경 때문이다. 현 정치 상황은 극단적인 수준의 진영논리가 팽배해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두 거대 정당 지도부는 철저히 강성 지지층에 기대는 모습을 보였다. 여당 지도부는 대통령 사건에 대한 공소를 취소할 수 있는 이른바 ‘공소취소법’ 추진에 나섰고, 야당 지도부는 강성 지지층의 눈치를 보느라 비상계엄에 대한 입장조차 정리하지 못했다.

반면 상대 정당에 대한 감정적 적대감이 투표를 결정짓는 감정적 양극화의 시대에는 후보 개인에 대한 평가나 견제 심리보다 진영논리가 투표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당투표가 강화돼 여러 선거에서 동일 정당 후보를 선택하는 정당 일괄투표(straight-ticket voting)가 증가한다. 이번 선거에서 두 거대 정당 지도부가 ‘믿은 구석’이었을 것이다.

정치적 양극화가 가장 심각한 국가 가운데 하나인 미국에서도 교차투표는 1970∼1990년대에 가장 강했고 최근에는 정당 양극화로 인해 급감했다. 하원을 기준으로 대선과 하원 선거의 승자가 다른 지역구의 수는 전체 435곳 가운데 2000년 80여 곳에서 2020년 16개까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어떨까. 1995∼2026년 총 9차례의 지방선거를 대상으로 기초단체장 선거가 없는 제주도와 세종시를 제외한 각 시도에서 광역단체장 선거의 정당별 총득표와 기초단체장 선거의 정당별 총득표를 비교해 다수 득표 정당이 서로 달랐던 사례를 살펴봤다.

우선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이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는 승리하지 못한 교차투표 사례는 총 135건의 광역단체장 선거 가운데 모두 20건으로, 전체의 15% 정도였다. 이마저도 다당 구도에서 치러져 동일선상에서 비교가 어려운 5회 지방선거(2010년)를 제외하면 약 12%(14회)로 낮아졌다. 즉, 10번에 한 번 정도로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시계열적으로 살펴보면 1990년대에 치러진 1회와 2회 지방선거에서는 각각 3곳에서 교차투표가 나타났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실시된 3회와 4회 지방선거에서는 교차투표가 단 한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며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이후 다당 구도 속에서 치러진 5회 지방선거에서는 6곳, 박근혜 정부 시절 실시된 6회 지방선거에서는 4곳에서 교차투표가 나타나며 잠시 부활하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정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7회 지방선거에서는 교차투표가 단 한 곳도 나타나지 않았고, 8회 지방선거에서도 1곳에 그치는 등 다시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이번 9회 지방선거에서 다시 3곳에서 교차투표가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 구청장 선거와는 다른 결과로 특히 관심을 끌었던 서울시장 선거의 경우 총 9차례 지방선거 중에서 처음으로 교차투표가 나타났다.

정치적 양극화라는 난치병을 앓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에서 교차투표를 부활시킨 유권자들의 선택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여당은 전당대회와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친명-친청 갈등이 점입가경이고, 국민의힘에서는 ‘30∼40명 의원 징계’라는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거론된다. 교차투표는 진영논리에 매몰된 정치권을 향해 유권자들이 던진 조용하지만 준엄한 경고장이다. 극단의 정치가 판치는 시대, 유권자가 써 내려간 이 교차투표라는 시적 엔딩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정당만이 미래를 얻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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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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