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재영]‘폴더 인사’, 허리만큼 중요한 정책 유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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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논설위원

김재영 논설위원
일본의 인사법인 ‘오지기(お辞儀)’는 허리를 굽히는 각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 중 45도 이상 깊이 숙이는 ‘사이케이레이(最敬禮)’는 상대에게 가장 깊은 감사나 사죄를 전할 때 쓰인다. 우리가 흔히 ‘90도 인사’ 혹은 ‘폴더 인사’라 부르는 게 이 수준이다. 지난달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한 인사는 이보다 훨씬 깊었다. 60대의 허리 유연성을 생각하면 내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몸을 굽힌 파격적 예우였다.

대통령의 깜짝 인사에 일각에선 보여주기식 퍼포먼스라거나, 800조 원 규모의 서남권 반도체 특혜 논란을 의식한 것이라며 깎아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늘 인사를 받는 데 익숙한 최고 권력자가 기업인들을 “국민 영웅” “국가 영웅”이라 칭하며 깍듯이 경의를 표한 장면의 상징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어부바’완 달라야 할 ‘폴더 인사’

역대 대통령들도 수사(修辭)로는 늘 기업인들을 극진히 모셨다. 단골 메뉴는 ‘업어주기’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투자하는 분들은 업고 다녀야 한다”고 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도 “일자리를 창출한 기업은 업어주고 싶다”고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 비슷한 약속을 했다. 대통령들이 직접 기업인들에게 등을 내어준 건 아니었지만, 박 정부 시절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기업 대표를 업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에 대한 대통령의 지극한 감사가 진정한 기업 존중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말로는 업어준다면서 뒤로는 교묘하게 팔을 비틀었다. 박 정부는 미르·K스포츠재단 강제 모금으로 기업을 동원했다. 문 전 대통령은 경제계 최대 행사인 신년인사회에 5년 임기 동안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윤 정부는 한술 더 떴다. 엑스포 유치 실패 직후 주요 대기업 총수들을 부산 국제시장으로 불러 모아 연출한 ‘떡볶이 먹방’은 보기에 민망했다.

과거 정치권이 기업을 쉽게 윽박지르고 동원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기업 때리기’가 지지율에 도움이 된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정경유착과 오너 일가의 갑질 등으로 촉발된 반기업 정서를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기업을 바라보는 국민의 인식은 확연히 달라졌다. 지난달 대한상공회의소가 조사해 발표한 ‘기업호감지수’는 100점 만점에 60.1점으로, 매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2003년 첫 조사 때 38.2점과 비교하면 격차가 크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며 국가 경제를 이끌고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인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기업인 눈으로 보면 달리 보일 것

이번 파격 인사에도 찜찜한 구석은 남아 있다.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낸 과정을 두고 대통령은 “좋게 말하면 유도, 심하게 말하면 유인”이라며 “억압이나 강요는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 경계는 지극히 애매하다. ‘억압이나 강요’가 아니었음을 입증하고 싶다면 전폭적인 기반시설 확충과 낡은 규제 철폐를 서둘러야 한다. 3대 메가프로젝트 준비 과정에서 원전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바뀌고, 주 52시간 근로제 완화가 검토되는 등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고무적이다. 기업인을 영웅이 아닌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형법상 배임죄와 중대재해처벌법, 산업 현장을 파업으로 옭아매는 노란봉투법 등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업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업하는 사람의 눈으로 현장을 보면 앞으로 달리 보이는 게 더 많아질 것이다. 백 마디 미사여구나 한 번의 파격적인 인사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이 마음껏 뛸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주는 실질적 변화다. 허리의 유연성보다 중요한 건 정책의 유연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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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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