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건 책을 매개로 한 연결
이 느슨한 거래에 실패란 없다
텍스트힙에 힘입은 교환 독서가 생기기 이미 오래전, 아이디 공유할 넷플릭스도 전자책 플랫폼도 없던 시절, 친구 책 돌려 읽는 게 일상이던 때가 있었다. 자습시간이면 몰래 풀하우스나 언플러그드 보이 같은 만화책을 시계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돌려 읽고, 하나둘 사 모은 소장 책을 서로에게 사적으로 대출하거나 대출받으며 지내곤 했다.
친구들끼리 돌려 읽는 책의 대출 기한은 대부분 무제한이다. 책을 빌리거나 빌려줄 때 서로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왠지 그 책을 다시는 돌려받지 못할 수 있겠단 예감을 하곤 한다. 과연 상대는 책을 받자마자 그 책 읽는 것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삼을 것인가? 반대로 나는 이 책을 되돌려받는 데 모든 것을 걸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 확실시됐다. 세상은 너무나 분주하고,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빌린 책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뭔가에 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불안함을 기꺼이 잠재우는 건 상대와 나 사이에 놓인 인간적 신뢰, 즉 우정이었다. 우리의 관계가 이어지는 한 그 책이 내 책장에 꽂혀 있든, 상대의 책장에 꽂혀 있든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책장을 옮기는 동안 내 서가에는 계속 내 것 아닌 누군가의 책이 몇 권씩 꽂혀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내 책 역시 다른 이들의 책장에 흘러들어갔다.‘빌린 책’은 내 세계에 흔적을 남긴 타인의 취향이라 볼 때마다 묘한 이질감과 채무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매번 돌려주는 걸 까먹는 건, 결국 이렇게 될 줄(=장기연체) 예감하면서도 그들이 기꺼이 책을 건네주었단 그 사실, 책보다 훨씬 중요한 게 이 관계에 놓여 있다는 무해한 믿음 덕분이었다.
몇 년 전 꼭 읽고 싶은 책 두 권이 같은 시기에 나온 적이 있었다. 한 권을 먼저 샀는데 회사 동기가 같은 고민을 하다 다른 한 권을 먼저 샀다는 걸 알게 됐다. 취향이 비슷한 친구가 있다는 건 경제적으로도, 자아효능감 측면에서도 좋다. 이럴 때 서로의 안목을 칭찬하는 건 칭찬을 빙자한 자기 과시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회사 모처에서 다 읽은 책을 교환했다. 성공적이란 느낌을 주는 인생의 드문 거래 중 하나였고, 여전히 내 서재엔 원래 샀던 책이 아니라 그때 빌린 그 책이 꽂혀 있다.
활자를 매개로 연결된 우정은 품이 넓고 느슨하며 자유롭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 주고, 돌려줄 때까지 기다려 주고, 설령 너무 오래 걸려도 기다려 준다. 요즘 유행하는 교환 독서에 꽂힌 이들이든, 빌려주고 빌리며 옛날 식으로 읽는 이들이든, 내 책이 아닌 누군가의 책이 서가에 꽂힌 이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인생의 좋은 벗인 책, 그리고 그 책을 함께 읽어주는 더 다정한 벗들이 있다는 뜻이니까.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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