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시도에도 정체성 논란 부른 K-오페라 '물의 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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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창작 오페라 ‘물의 정령’ 공연장에 들어서자 파도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물의 영상이 객석을 감쌌다. 예술의전당이 아르떼 뮤지엄과의 협업으로 구현한 바다 위 풍경은 관객들을 작품 세계로 끌어들이려는 인상적인 이벤트였다. ‘물의 정령’은 이 오프닝 무대처럼 다양한 기법과 참신한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완성도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할 만한 요소가 많았지만 아쉬운 점도 적지 않은 무대였다.

◇ 참신한 시도 돋보여

‘물의 정령’은 예술의전당이 ‘제작 극장’으로 변모할 의지를 내비치며 손수 만든 첫 작품으로 이날 초연했다. 제작 극장이란 이탈리아 라스칼라, 영국 코번트가든, 일본 신국립극장처럼 극장이 공연을 직접 만드는 것을 말한다.

‘물의 정령’은 국내에서 만들어졌지만 해외 진출을 고려해 가사가 영어로 쓰였다. 오페라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성악가의 독창, 즉 아리아가 등장하지 않는 것도 눈에 띄었다. ‘투란도트’의 테너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나 ‘라 보엠’의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 등 유명 오페라에는 작품을 대표하는 아리아가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부분이었다.

‘물의 정령’에는 모음 ‘아’로만 노래가 이어지는 멜리즈마(가사 없이 한 음절로 음의 연결을 길게 부르는 기법)가 자주 쓰였다. 종교음악에서 주로 쓰이는 창법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좋았지만, 때때로 가사 없는 음악에서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예술의전당이 제작해 지난 25일 초연한 창작 오페라 ‘물의 정령’ 중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예술의전당이 제작해 지난 25일 초연한 창작 오페라 ‘물의 정령’ 중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공연이 끝난 뒤 현장 반응은 엇갈렸다. 지휘자 스티븐 오즈굿은 전자 음향과 오케스트라의 균형을 정교하게 조율했고, 성악과 반주의 조화를 중시한 해석으로 호평받았다. 반면 스티븐 카르의 연출은 아쉽다는 평가가 많았다. 1막에서 공주의 병을 논의하는 장면에서 여러 성악가가 아무런 동작 없이 서서 노래하는 장면이 오래 지속돼 극 전체의 흐름을 방해한 게 대표적이다.

무대 위 성악가들의 기량에도 평가가 엇갈렸다. 공주 역의 소프라노 황수미는 뛰어난 기량과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중심을 잡았다.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역시 안정감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시계 장인 역할로 극을 이끌었다. 물의 정령 역인 카운터테너 정민호는 신비로운 음색으로 극의 분위기를 살렸으며, 베이스 김동호와 바리톤 박은원도 각자의 배역에서 부족함 없는 가창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반면 시계 장인의 제자 역을 노래한 아일랜드 출신 테너 로빈 트리출러와 왕 역의 애슐리 리치는 대극장을 울림으로 채우기엔 성량이 부족했다.

이날 무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건 합창이었다. 노이오페라코러스는 물속 식물처럼 유영하며 노래하는 등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혼성 합창단이 유기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며 극의 한 축을 담당하는 부분은 한국 오페라 합창의 수준이 한층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 韓 정체성 느끼기 힘들어

‘물의 정령’은 무대기술과 기악, 영상예술이 유기적으로 얽혀 탄생한 결과물이다. 전통적 방식에 국한하지 않고 영상과 조명, 전자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관객이 마치 일렁이는 물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내게 할 만큼 연출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갓 태어난 작품에 ‘K오페라’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많은 개선과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한 오페라 연출자는 “한국적 요소라 불릴 만한 건 항아리 소품, 거문고 연주, 2막에 잠깐 등장한 가수 싸이의 ‘새’ 안무를 따라 한 공주의 동작 정도”라며 “이 작품이 K오페라라면 푸치니의 ‘나비부인’도 J(일본)오페라라고 불러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예술의전당은 ‘물의 정령’을 향후 호주, 대만, 일본 등에 수출할 계획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오페라라면 작품의 스토리에 한국의 역사적 자신감이 돋보여야 한다.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은 ‘The Rising World’이고 극 중 ‘물의 정령’으로 불리는 존재는 ‘Water Ghost’로 번역됐다. 영어로 번역하며 한국적 특성을 잘 담아내지 못했다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모든 가사가 영어로 된 작품에 K오페라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냐는 지적이 많았다. 전통적인 오페라 분류법은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 언어를 기준으로 어느 나라 작품인지 나눈다. K오페라라면서 호주 출신 작곡가(메리 핀스터러)와 대본가(톰 라이트)가 작품을 만든 것에도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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