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의 쇠락한 시골 마을 용징에서 나고 자란 한 남자가 있다. 고향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 의심했다. '이런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을 거야. 기껏해야 책을 100권 찍고 그 중 99권은 우리 누나들이 사겠지.' 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는 요즘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각국에서 온 독자들이 그가 쓴 소설책을 들고 용징을 여행한 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있는 것.
<귀신들의 땅> <67번째 천산갑>을 쓴 타이완 소설가 천쓰홍은 19일 서울 삼성동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요즘 동네를 배회하는 독자들을 보고 고향 사람들이 '귀신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면서 웃었다. 타이완은 대부분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서 과거에는 동네에서 걸어다니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고.
천쓰홍은 2023년 12월 국내 출간된 <귀신들의 땅>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이름을 알렸다. 실제 작가의 고향인 용징을 배경으로 천씨 집안의 막내아들이자 성소수자인 주인공 천톈홍과 다섯 누나의 삶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타이완의 고도 성장기 1980년대에 보수적인 농촌 마을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폭력을 증언한다. 2019년 현지 출간 이후 12개 언어로 번역됐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국내 처음 소개된 해외 작가로는 이례적으로 책이 13쇄를 찍을 정도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천 작가는 "그저께 서울에 왔는데 호텔 앞에서만 세 명의 한국 독자가 나를 알아봤다"며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눈물을 흘려 굉장히 놀라운 경험이었다"고 전했다. 독일 베를린에 거주 중인 그는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타이완은 올해 도서전에서 주목하는 주빈국이다.
올봄 개인적으로 서울을 여행하며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누볐다는 그는 기자들에게 새롭게 쓰게 될 소설에는 서울이 등장할 거라 귀띔하기도 했다. 글의 흐름을 위해 인터뷰 질문 순서 등은 일부 편집을 거쳤다.
▷작년에 이어 방한했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한국 독자들을 만나는 건 처음인데 소감이 궁금하다.
"실은 이번이 세 번째 서울 방문이다. 지난해에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했고, 두 번째는 4월에 몰래 여행하고 갔다. 공식적인 일로 한국에 오면 호텔, 공항, 행사 장소만 오가는데 온전한 관광객이 돼서 한복 입고 경복궁도 가고 광장시장 가서 이불도 샀다. 바보 관광객처럼 돌아다녔다.(웃음)
어제 도서전 개막일에 타이완 작가이자 밴드 가수인 장쟈상이 공연을 했다. 기분이 좋아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올라가 노래했다. '사랑 차차'라는 대만에서 오래된 유행가를 불렀다. 타이완어로 노래를 하니 고향으로 돌아간 것처럼 기뻤다."
▷타이완어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나. (장쟈상 작가는 타이완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반면, 천 작가는 표준 중국어로 소설을 쓴다.)
"내게 타이완어는 완전히 잃어버릴 뻔한 보물이다. 어려서 7살까지는 타이완어가 모국어였다. 그런데 국민당이 표준 중국어만 사용하고 타이완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면서 학교에서 타이완어를 쓰면 '나는 타이완어를 썼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적힌 글자판을 목에 걸고 다니는 벌을 줬다. 어머니는 표준 중국어를 배운 적 없어서 타이완어만 사용했고, 나는 타이완어가 촌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점차 어머니와의 대화도 끊겼다. 현재는 조금씩 소설에 타이완어를 넣기도 한다. 하지만 제가 잃어버린 언어라 전체를 소설로 쓰는 걸 불가능하다."
▷과거 보수적인 타이완 시골 사회에서 성소수자로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50세이니까 구시대 타이완에 살았던 성소수자다. 그 당시 성소수자가 타이완에 사는 건 많은 압박을 받는 일이었다.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이 합법화되면서 인식이 많이 변화됐다.
<악어노트>를 쓴 여성 퀴어소설가로 파리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츄먀오진 역시 용징 출신이다. 글에서 용징을 언급하지 않아서 초등학교 동문인데도 전혀 몰랐다. 그 작가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고향에 대해 쓰지 않았을까. 저는 오늘날까지 버티고 살아남아서 고향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향'이 작품의 주요 소재다. 용징은 당신에게 어떤 곳인가. (천 작가는 타이베이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났고 현재는 타이완에 살고 있지 않다. 그가 참여하는 도서전 프로그램 제목은 '달아나고, 돌아오다: 타이완 퀴어문학의 여정'이다.)
"고향은 제게 복잡한 이미지다. 과거에는 고향 얘기를 하기도 싫고 시골 이미지도 숨기고 싶고 말투도 바꾸고 싶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고향을 알리고 싶다. 고향에는 극장도 없고 문학도 없어서 고향을 탈출했다. 50세가 된 지금은 고향을 되찾는 중이다."
▷당신의 소설 속 고향은 어린 시절 실패, 외면하고 싶은 기억의 공간이다. 청춘 시절 실패를 다룬 이야기가 젊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과거의 즐겁지 않은 내용을 책으로 쓴 이유는 '기억'이다. 지금 살고 있는 독일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가 나치의 잔혹한 학살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 기억을 강조하는 것이다. 문학을 통해 기억을 책으로 활자로 남기면서 '잊지 않아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소설 속 주요 소재인 '귀신'은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상징 같다.
"귀신은 과거의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에 잊어서는 안되는 기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귀신은 타이완 문화의 기반이 되는 토속신상이다. 타이완에는 '귀달', 즉 귀신의 달이라는 게 있다. 음력 7월 한 달은 귀신의 달이라 지옥문이 열려서 모든 귀신이 나온다고 믿는다. 이들을 달래려 사람들은 풍성한 제사음식을 준비한다. 이때는 여행, 이사, 결혼도 하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다. 호텔에 묵을 때 빈 방에 들어가기 전에 노크를 하고 '귀신아, 나 왔어.' 이렇게 말할 정도다.
옛 이야기 속 귀신은 대부분 여성이다. 과거 여성차별, 여성에 대한 폭력이 심하던 사회에서 여성은 귀신이 된 후에야 초인적인 힘을 갖고 복수를 한다."
▷최근 타이완에서 세 자매를 소재로 한 새 소설을 출간했다.
"조만간 한국에도 출간될 것 같다. 마찬가지로 고향에 대한 이야기다. 용징 옆에 있는 사터우(社頭)씨 집성촌 얘기인데, '사터우'에는 '미쳤다'는 뜻도 있어서 사터우씨 세 자매 이야기인 동시에 미친 세 여자의 이야기다."
▷올해 도서전에 젊은 독자들이 많이 찾아왔다. 한국에서는 '텍스트힙(책 읽기는 멋있다)' 등 2030세대의 독서 열풍이 뜨겁다. 대만 출판시장의 독자층의 연령은 어떤가.
"한국에 젊은 독자들이 늘어난 건 기쁜 일이다. 어제 만난 한국 독자들도 모두 2030세대였다. (현재 거주하지 않아) 대만 상황을 잘은 모르지만 대학에 강연을 가서 받은 느낌은 책과의 거리 가깝지 않은 느낌이었다.
한국의 문학 작품은 타이완에도 매우 많이 번역, 출판돼있다. 소설가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베스트셀러다. K팝, 영화도 인기다.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 타이완 사람들이 부러워 죽을 뻔했고,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는 부러워서 미칠 뻔했다.(웃음)"
▷화자의 시점, 시간적 배경이 자주 바뀌는 서술 방식을 활용한다. 영화 같기도 하다. 창작 과정에서 영상화를 염두에 두는 편인가.
"소설 속 시점이 계속해서 바뀌고 누가 누군지 모르게 만드는 구조다. 읽기 어렵다는 반응을 알고 있다.(웃음)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고 글 쓰는 데 있어 영화 영향도 많이 받은 것 같다. 영화사에서 귀인이 찾아와서 영상화 판권을 팔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직까지 성사된 건 없다."
▷앞으로의 작품 계획이 궁금하다.
"서울과 관련된 사랑 이야기를 하나 쓰고 있다. 제가 젊었을 때 한국 남자와 잠깐 연애한 적이 있다. 작년 서울국제작가축제 참석차 한국에 왔을 때 그분을 만났다. 연락이 끊겼다가 그분이 '딸이 집에서 <귀신들의 땅>을 읽고 있어서 작가 이름을 봤다. 귀신을 본 것 같았다'며 연락이 왔다. 마치 K드라마의 주제곡이 등 뒤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랑을 전면적으로 다룬 적이 없는데 이 소설이 오글거리지 않았으면 한다. 영화화됐으면 좋겠다. 마음 속으로 주인공까지 정해놨다. 허광한 배우다.(웃음)"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