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면 내 고향 서귀포에는 바당 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오고, 외할머니댁 뒷산에는 아까시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어린 나는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린 하얀 그 꽃을 참 좋아했다. 한 송이라도 손에 넣어 보려고 까치발을 들다가 풀썩 주저앉곤 했다. 어느 날은 꽃가지 사이에서 ‘윙윙’ 소리가 났다. 잎을 들춘 순간, 코앞에서 벌 한 마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기겁한 나는 울며 정신없이 달아났다.
그 뒤로 한동안 하얀 꽃만 봐도 몸이 움찔했다. 여름이 가까워질 무렵, 할머니는 자그마한 통 하나를 꺼내셨다. 밥숟가락으로 꿀을 한가득 떠 내 입에 넣어주셨다. 다디달았다. 할머니는 벌이 부지런히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모은 꿀이라고 알려주셨다. 너무 미워하지도, 무서워하지도 말라며 다독이신 것이다. 그날 이후 벌은 무서운 곤충이 아니었다. 꽃과 계절을 오가는 작은 일꾼으로 내 마음에 깊이 남았을 뿐.
지난달 경기도 안성에서 열린 꿀샘식물(밀원수) 식재 행사에 다녀왔다. 아이들이 아까시나무 묘목을 심은 뒤 흙을 꾹꾹 눌러 다지는 모습을 보니 오래전 내 기억이 겹쳤다. 이날 우리가 심은 건 작은 묘목이지만, 몇 해가 지나 꽃이 풍성하게 피면 꿀벌은 든든한 곳간이 생기고, 양봉농가에는 소득 기반이 된다. 들과 산에는 또 하나의 생명 길이 놓인다.
꿀벌은 농업과 생태계를 잇는 중요한 존재다. 우리가 먹는 과일과 채소, 견과류 상당수는 벌과 같은 수분 매개자의 도움을 받는다. 꽃가루가 옮겨져야 열매가 달리고, 그 열매가 우리의 식탁을 건강하고 풍성하게 채운다. 하지만 요즘 꿀벌의 삶은 녹록지 않다. 기후 위기로 꽃 피는 시기가 들쭉날쭉하고, 반복되는 가뭄과 폭우로 먹이를 찾기도 어려워졌다. 여기에 병해충과 농약, 서식지 감소까지 더해져 벌의 날갯짓은 나날이 위태로워지고 있다.
해법은 거창한 구호보다 가까운 실천에서 시작된다. 꿀벌이 머물 꽃과 나무를 늘리는 것처럼 말이다. 농촌진흥청은 2017년부터 양봉 농가와 함께 지역의 기후, 토양에 맞는 꿀샘식물을 심고 있다. 지역별 특화 벌꿀 생산을 위한 밀원 단지도 조성 중이다. 나무를 심는다는 건 곧 시간을 심는 일이다. 오늘 심은 한 그루가 당장 숲을 이룰 수는 없다. 다만 해마다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다 보면, 언젠가 벌이 쉬고 꽃도 필 자리가 된다.
우리는 종종 빠르고 큰 변화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자연은 작은 연결과 또 다른 연결로 유지된다. 벌 한 마리가 꽃 사이를 오가고, 나무 한 그루가 그 길을 붙들 때 생태계도 회복된다. 농업의 미래도 그렇게 이어진다. 빠른 성과보다 탄탄한 기반을 쌓는 일, 작아 보여도 꼭 필요한 일을 멈추지 않는 것부터 시작이다.
꿀 한 숟가락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담겨 있다. 꽃이 필 날을 기다린 계절, 벌이 날아간 거리, 농가의 손길과 자연의 인내가 함께 녹아 있다. 할머니가 건네준 그 깊은 달콤함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봄꽃이 한창인 길을 걸으며 생각해본다. 우리가 심는 나무 한 그루가 꿀벌에게는 ‘밥상’이 되고, 농가에는 희망으로, 다음 세대에는 더 단단한 봄으로 돌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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