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 등장하지도 않는 인물의 존재감을 이토록 치밀한 영상 언어로 구현해냈다. 영화 <레베카(Rebecca)>에서 ‘레베카’는 실체가 없지만 가장 강력하게 실재하며, 영화 속 ‘나’뿐만이 아닌 관객에게까지 심리적 중력과 정서적 억압을 행사한다. <레베카>는 실체 없는 ‘그녀’와 이름 없는 ‘나’의 이야기다.
평범한 ‘나’는 부유한 남자 ‘맥심’과 결혼하며 단숨에 귀족 세계로 편입된다. 하지만 그곳은 낭만적인 동화가 아니라, 고요하고 음울한 성 같은 공간 ‘맨덜리’다. 이곳은 단순한 저택이 아닌 기억의 화석이며, ‘레베카’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장소다. “인간의 경험이나 관계가 개입될 때 공간은 단순하고 중립적인 배경에서 감정과 정체성까지 담는 장소로 변화한다.”(이언정, 2025) 그런 의미에서 ‘레베카’와 지독히도 얽힌 맨덜리 저택은 주요 배경과 공간을 넘어 이미 ‘나’의 존재감을 지우고 영혼을 압박하는 공포의 장소가 되었다. 더욱이 맨덜리에는 ‘댄버스 부인’이라는 레베카의 잔존까지 굳건히 발붙이고 있기에.
레베카는 형체가 없음에도 서사 전체를 지배하고, 관객은 끊임없이 그녀의 존재를 궁금해한다. 눈으로 볼 수 없음에도 레베카를 상상하고, 두려워하며, 질투하게 된다. 마치 ‘나’처럼. 레베카는 실상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압도적 아우라로 장면을 휘감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부재함으로써 유지되는 권력, 실체가 없어 더 무서운 존재의 파괴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감독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미스터리 장치로 끌어올리며, 인간이 왜 실체 없는 것에 지배당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레베카’라는 존재를 히치콕 특유의 심리적 서스펜스의 매개로 활용해 그만의 영상 언어로 풀어낸 연출은 늘 그렇듯 놀랍다. 물론 히치콕 자신은 할리우드 데뷔작인 이 작품을 여러 이유로 그리 만족해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레베카>가 히치콕 커리어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영화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이 ‘보이지 않는 존재의 공포’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실체 없는 존재’들과 싸운다. 짙은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그리고 지우지 못한 실패의 기억과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에 갇혀 현재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한 영향력을 지닌 레베카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평가와 타인의 시선, 사회적 이미지,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무형의 권위, SNS 속 이상적 타자 등, 구체적인 얼굴 없이 현대인의 선택과 감정을 조종하는 불안의 원형은 여전히 존재한다. 영화 속 이름 없는 ‘나’는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며, ‘레베카’라는 이상적 존재의 그림자에 갇혔다.
도저히 ‘나’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 나보다 앞서 존재하는 ‘더 완벽한’ 누군가에 대한 환영, 이것은 영화 밖에서 현대인들도 겪는 유사 감정이다. 늘 비교당하는 실체 없는 타인의 성공, 누가 정했는지도 모를 성공의 정의, 아름다움, 커리어, 완벽한 인간관계 등은 정신적 압박을 가하며 현대인을 압도한다. 이처럼 타인에 의해 검열된 ‘나’는 지금 없는 존재와 싸우고, 보이지 않는 기준을 좇으며, 이름 없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정작 실체 없는 대상에게 강력한 실재를 선사하는 것은 결국 우리 마음속 깊이 드리워진 두려움 아니겠는가. 인간 심리 저변에 깔린 불안함과 두려움의 형상이 실체 없는 얼굴에 강력한 실재를 부여하고, 그것을 마주하게 된 우리는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내몰려진다.
그러나 그대, 기억하라. 그러한 실체 없는 것들에게 휘둘리는 감정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존하는 그대만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대, 그 무엇에도 눌리지 마라. 그대 인생을 이끌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단연 그대에게 있으니, 그렇게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내기를.
맨덜리가 불에 타 사라지고 이름조차 불리지 않던 ‘나’는 마침내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 현실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주체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렇게 히치콕의 <레베카>는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여전히 현대적인 이야기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이언정 칼럼니스트
영화 ‘레베카(Rebecca)’ (1940) 예고편
[참고문헌]
이언정. (2025). <오징어 게임> 공간과 캐릭터의 인터랙션 : 연기의 장소성과 의미. 한국엔터 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19(2), 129-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