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랜드마크 중 하나인 피사의 사탑에 가면 탑을 손으로 밀거나 받치는 포즈를 취하는 수많은 관광객을 만날 수 있다.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머라이언상 옆에선 동상이 내뿜는 분수를 받아 마시는 것처럼 입을 쫙 벌리고 있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렇게 소셜미디어에 올릴 천편일률적인 인증샷을 찍는 사이, 그날의 청명한 하늘과 이국땅을 감싸는 짭조름한 향은 우리의 감각 밖으로 튕겨 나간다.
미국의 문화 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크리스틴 로젠은 신간 <경험의 멸종>에서 스마트폰, 태블릿 등 기기와 이와 연동된 디지털 기술이 바꿔놓은 우리의 일상을 통찰력 있게 파고든다. 여행지를 두 눈이 아닌 카메라 렌즈가 담는 것처럼, 기술에 의한 ‘매개 경험’이 직접 경험을 대체하면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온전히 느끼고 배울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디지털 기술이 점령한 일상의 풍경은 미술관에서도 쉽게 목격된다. 우리는 작품을 충분히 감상하기보다 휴대폰에 남긴 사진만 믿고 다음 작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미술관 방문객이 한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은 평균 15초 내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자신의 비밀을 천천히 드러낸다”는 필립 드 몬테벨로 전 메트로폴리탄미술관장의 말이 무색할 정도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은 사진을 찍음으로써 특정 작품을 기억할 계기가 생긴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무질서하게 기록된 방대한 양의 디지털 사진 때문에 오히려 기억을 되새기고 되살리는 것이 방해받는다는 게 연구자들의 주장”이라고 전한다.
온라인상 만남은 대면 소통만이 줄 다양한 가능성을 앗아간다. 원활한 의사소통 능력이 감퇴하고 때로 생산성이 저하된다.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온기 역시 화면 너머로 전달되지 못한다. 저자는 “(온라인 데이팅 앱) 매치닷컴에는 희미해진 향수 냄새가 없고, 틴더의 알고리즘에는 연인의 피부가 주는 느낌이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대면 상호작용은 과학 연구의 질을 높인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저자가 인용한 하버드대 생물의학 정보센터 연구에 따르면 공저자들이 물리적으로 가까울수록 그들의 연구가 인용되는 횟수가 늘었고, 반대로 거리가 멀어지면 인용 횟수는 감소했다.
이런 비대면 접촉 서비스는 빅테크업체의 이윤 추구와 경쟁 속에서 고도화하고 있다. 심지어는 심박수 모니터링을 통해 이용자의 감정을 불편하게 만드는 상대방을 친구 목록에서 자동으로 삭제해주는 스마트폰 앱까지 등장했다. 이런 기술은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자신의 감정이 지닌 의미를 성찰하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더 큰 우려를 낳는다.
가장 심각한 건 우리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는 병을 앓게 됐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화면 속 무수한 콘텐츠는 단 1초의 빈틈마저 즉시 채워준다. 정교하게 진화한 알고리즘은 우리가 요구하기도 전에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다. 애써 발품을 팔지 않아도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무언가를 ‘기대’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도 거세되고 있다.
저자가 반기술주의를 외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술이 위협하는 현실에 경고음을 울리고, 인간의 손길이 가진 가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