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 연속성: "내 연금, 끝까지 나를 따라오라"[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6

1 week ago 28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퇴사 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IRP 계좌 사본을 보내주세요.” 한국의 직장인이라면 낯설지 않은 퇴사 절차입니다. 회사를 떠날 때마다 우리는 은행에 가서 IRP 계좌를 새로 만들고, 퇴직금이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계좌를 해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 직장에 가면 또다시 새로운 퇴직연금 계좌가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연금 계좌는 ‘사람’을 따라오지 않고 ‘회사’를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회사가 바뀔 때마다 내 연금의 역사는 끊어지고, 다시 0원부터 시작하는 도돌이표를 밟게 됩니다. 그런데 연금 선진국이라 불리는 호주도 불과 몇 년 전까지 비슷한 문제를 앓고 있었습니다. 다만 병의 모양은 달랐습니다. 한국에서는 계좌가 조각난 뒤 쉽게 깨지는 쪽으로 흘렀고, 호주에서는 여러 계좌가 방치되며 수수료와 보험료가 새는 쪽으로 흘렀습니다. 그 씨앗은 역설적이게도 호주 슈퍼애뉴에이션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에 숨어 있었습니다. 1983년 캔버라의 실수 — “사람이 아니라 회사를 보았다” 앞 장에서 살펴본 1983년 호주의 ‘노사정 대타협’을 떠올려 봅시다. “기업이 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연금으로 넣어준다”는 합의는 호주를 연금 강국으로 만든 결정적 장치였습니다. 하지만 그 설계에는 한 가지 빈틈이 있었습니다. 연금 적립이 사람의 생애 계좌가 아니라, 고용관계와 기업의 선택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A사에 입사하면 A사가 정한 기금, B사로 이직하면 B사가 정한 기금에 들어가는 식이었습니다. 평생 여러 번 이직하면, 내 이름으로 된 연금 계좌도 여러 개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주의 비극(뱀파이어) vs 한국의 비극(리셋) 시간이 흐르자 호주 전역에는 이른바 ‘뱀파이어 계좌(Vampire Accounts)’ 문제가 커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연금 계좌를 갖게 되었고, 흩어진 계좌들에서는 매달 관리 수수료와 보험료가 빠져나갔습니다. 계좌가 하나로 모여 있었다면 투자로 불어났을 돈이, 작은 잔액들 속에서 비용으로 새어 나간 것입니다. 한국의 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뱀파이어 계좌’보다 ‘리셋(Reset)’에 가깝습니다. 호주에서는 계좌가 흩어진 채 남아 비용을 갉아먹었다면, 한국에서는 계좌가 조각나는 순간 “어차피 푼돈인데 그냥 쓰자”는 유혹이 커집니다. 자산이 한 계좌에 뭉쳐 있으면 깨기가 어렵지만, 이직 때마다 작은 덩어리로 떨어져 나오면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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