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률 경쟁: "호주의 실험, 시장이 연금을 키우다"[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5

1 week ago 24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퇴직연금, 어느 은행으로 하는 게 좋아요?” “아무 데나 하세요. 어차피 수익률은 다 똑같아요.” 개인의 계좌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좌 안의 돈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그 돈을 운용하는 시장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앞 장까지 우리는 개인에게 넘어온 책임, 그 책임을 덜어줄 기본값, 그리고 이직해도 돈을 담아둘 그릇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질문은 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그 그릇에 담긴 돈은 어떤 경쟁과 규율 속에서 불어나야 하는가? 이것이 한국 직장인들의 서글픈 상식입니다.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수십 개의 퇴직연금 사업자가 있지만, 이들은 수익률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은행에서 대출받으셨으니 퇴직연금도 가입해 달라”며 기업 인사팀을 상대로 영업 전쟁을 벌입니다. 근로자의 수익률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익률이 좋든 나쁘든, 주어지는 상벌이 없습니다. 이것은 ‘경쟁’이 아니라 ‘담합’에 가까운 평화입니다. 앞서 살펴본 ‘기형적 삼각관계’가 시장 전체 차원에서 반복되는 셈입니다 — 경쟁의 화살표가 근로자가 아니라 기업 담당자를 향해 있으니, 사업자들끼리 굳이 수익률로 싸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반구의 호주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곳의 연금 기금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수익률이 경쟁사보다 낮으면 우리는 죽는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도대체 호주는 어떻게 연금 시장을 이런 ‘전쟁터’로 만들었을까요?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기금이라는 형식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 위에 만들어진 경쟁, 그리고 성과가 나쁘면 시장에서 밀려나는 퇴출의 규율입니다. 1983년 캔버라, “임금을 줄 테니 연금을 다오” 1983년, 호주 경제는 벼랑 끝에 있었습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속에서 노동조합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을 예고했습니다. 그때 밥 호크 총리와 노동당 정부는 노조 지도부를 은밀히 만났습니다. 그리고 캔버라에서 역사적인 대타협, 일명 ‘The Accord(협약)’를 제안합니다. “임금 인상을 자제해 달라. 대신 기업들로 하여금 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강제로 떼어 노동자들의 개인 연금 계좌에 넣게 하겠다.” 이렇게 시작된 강제 적립률은 1992년 「퇴직연금보장법(Superannuation Guarantee Act)」으로 법제화되면서 3%에서 출발해, 2002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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