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가입: "관성을 노후 자금으로 바꾸는 마법"[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7

4 days ago 15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사장님, 저희도 퇴직연금 가입 안 하나요? 옆 공장 친구는 가입했다던데…” “아유, 김 대리. 은행 가서 서류 쓰고 하려면 복잡해. 수수료도 나간다잖아. 나중에 내가 퇴직금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까 걱정 말고 일이나 해.” 중소기업 현장에서 흔히 벌어지는 대화입니다. 김 대리는 불안합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내 퇴직금도 날아가는 건 아닌지 걱정되지만, 사장님이 “복잡하다”며 손사래를 치는데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퇴직연금의 사각지대입니다. 근로자가 원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도입의 키를 쥐고 있는 사업주가 행정 업무의 부담과 비용 때문에 도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업주와 근로자를 계속 설득할 것이 아니라, 가입이 기본값이 되도록 시스템을 바꾸라”는 역발상으로 문제를 해결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영국입니다. 2005년 영국, “설득은 실패했다” — 터너 보고서 2000년대 초반, 영국은 심각한 연금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고령화는 빨라지는데 기업들은 비용 부담을 이유로 연금 도입을 꺼렸고, 국민들의 노후 준비는 비어 있었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캠페인을 해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어 총리는 금융 전문가 아데어 터너 경에게 해법을 요구했습니다. 3년의 연구 끝에 2005년 발표된 ‘터너 보고서’는 고령화 사회에서 연금 재정을 지킬 방법이 셋 중 하나뿐이라고 못박았습니다. 급여를 깎아 더 가난해지거나, 수급 연령을 높여 더 오래 일하거나, 아니면 더 많이 저축하거나. 그리고 세 번째 방법을 국가가 강제하는 대신 ‘부드럽게 개입’해서 실현하라고 제언했습니다. “기업의 선의나 개인의 결심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가입하는 쪽이 기본값이 되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이것이 행동경제학의 ‘넛지(Nudge)’ 이론을 제도화한 ‘자동 가입(Auto-enrollment)’의 탄생 배경입니다. NEST의 기적 — “고르지 않으면, 이곳으로 옵니다” 이 보고서는 2008년 연금법 제정으로 이어졌고, 영국은 2012년부터 대기업을 시작으로 자동 가입 의무를 단계적으로 적용했습니다. 이때 함께 등장한 핵심 장치가 NEST(National Employment Savings Trust)입니다. 앞서 잠시 예고했던, 한국의 ‘공공개방형’과 가장 닮은 공적 연금 기금입니다. 영국 제도에서 사업주는 일정 요건을 갖춘 근로자를 적격 연금제도에 ...

Read Entire Article